아동문학가 정지영(37·사진)씨가 그린 지도는 보통 지도와 다르다. 일반 지도에선 삼거리인 길이 외길로 그려지기도 하고, 큰 빌딩보다 편의점과 은행이 더 자주 등장한다. 경사로와 주차장·화장실 표시도 곳곳에 나타난다. 바로 장애인을 위한 지도이기 때문이다.
2011년부터 제작된 이 특별한 지도가 이달 초 『오늘 이길, 맑음』(도서출판 미호)이란 책으로 출간됐다. 여행 에세이 형식을 띈 이 책엔 서울 시내 지하철역 20개를 중심으로 장애인이 마음 놓고 다닐 만한 나들이 장소와 산책로, 문화시설 등이 소개돼 있다. 지도 속 모든 길은 경사가 낮고, 바닥이 평평하며, 문턱이 없어 장애인이 다니기 쉽다. 계단 대신 휠체어로 갈 수 있는 경사로가 있는 상점이나 장애인 주차장·엘리베이터 등도 표시돼있다.

정씨가 ‘특별한 지도’ 제작에 나선 건 6년 전이다. 『실패의 전문가들』(샘터) 등 동화책을 쓰면서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일하던 정씨는 자신의 재능으로 뭔가 뜻깊은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장애인을 돕는 비영리단체 밀알복지재단을 알게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문의했다. “막연하게 도울 일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한참 뒤에 장애인의 눈으로 보는 세상을 사진으로 담아달라는 제안이 왔어요. 일단 교회 지인 몇 명에게 부탁해 눈을 가리거나 휠체어를 타고 서울 시내 곳곳을 다녀 보기로 했죠.”
정씨는 장애 체험을 하고 그 과정을 석 달에 한 번 재단 소식지에 싣기로 했다. 하지만 막연히 불편할 거라고 예상했던 여정은 상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그는 “길을 헤매고 장애인 편의시설을 찾느라 지하철 역 한 정거장을 가는 데 2~3시간이 걸렸다”며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후 정씨는 장애 체험을 하러 갈 때마다 지도를 그렸다. 일반 지도에 표시된 길은 장애인에겐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을 것처럼 표시된 종로의 한 길은 실제로는 교통제어기 등 각종 시설물 탓에 이용이 불가했다. 또 강남의 대형 쇼핑센터나 영화관에도 장애인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다는 표시만 돼 있을 뿐 실제론 거의 운행되지 않았다. 정씨는 “심지어 장애인 보행 코스가 있다고 안내돼 있던 북한산을 가보니 정작 50m뿐인 적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최근 정씨는 이렇게 5년여 간 그린 지도를 묶어 출간을 결심했다. “많은 장애인이 밖에 나와 마음껏 여행하고 산책하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밀알복지재단에서 알게 된 지체장애 1급 유경재(29)씨가 답사에 동행해 세밀한 부분까지 조언해줬다. 책의 인세는 장애인의 인식 개선을 위해 전액 기부할 계획이다. 정씨는 앞으로 장애인끼리 의견과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나 웹사이트를 만들 생각이다.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고 취미처럼 즐겁게, 천천히 해나가는 게 목표입니다.”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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