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에겐 볼링장도 ‘그림의 떡’… 겉도는 ‘차별금지법’ / 제정 10년… 실효성 의문
시각장애 1급인 김모(35)씨는 지난 1월 주말에 지인들과 서울의 한 볼링장을 찾았다. 저시력 장애인 2명과 전혀 볼 수 없는 전맹 장애인 1명, 활동보조인 1명과 함께한 김씨는 30분 넘게 기다려 레인을 배정받았다. 그러나 첫 게임 10프레임 중 1프레임을 마치자마자 직원이 다가와 “안전상의 문제로 이용할 수 없다”고 했다. 김씨는 사장에게 “저시력 장애인은 볼링을 즐기는 데 별다른 무리가 없고 전맹 장애인도 활동보조인을 대동했다”고 반박했지만 볼링장 측이 “안전상의 이유로 취객도 받지 않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뻗대 허사였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이 중재에 나서도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접수하고 기자회견까지 여는 등 사태가 커진 뒤에야 볼링장 측은 △이용 거부에 대한 사과 △재발방지책 마련 △안전시설 설치 등의 요구안을 받아들였다.
저시력(3급) 장애인인 박모(39)씨는 지난 설 연휴를 앞두고 열차 승차권을 예매하기 위해 동이 트기 전부터 코레일 예매 전용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국민 수강신청’이라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데 전체 승차권의 70%가 온라인으로 판매되기 때문이다. 박씨는 오전 6시 정각에 맞춰 예약을 시도해 대기표를 받았지만 승차권 구입에 실패했다. 모니터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시각장애인용 음성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예매를 해야 하는 박씨로선 1인당 최대 접속시간인 3분 내에 열차와 승차인원 등 예매 관련 정보를 모두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코레일과 수도권고속철도(SR) 홈페이지는 둘 다 장애에 상관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는 ‘웹 접근성’ 인증 홈페이지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셈이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개선 요청 뒤 코레일 측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예매 적정시간 보장 등 시스템 개선 및 의견 수렴 등에 나섰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장애인이 불합리한 차별에 시달리는 경우는 흔하다. 놀이기구 탑승이나 공중목욕탕 이용, 헬스장 등 유형을 막론하고 ‘안전상의 문제’나 ‘다수(비장애인)의 불편이 크니까’ 등 단순한 이유로 차별을 당한다. 올해로 제정된 지 10주년을 맞는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차별금지법)’이 겉돌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10주년…실효성은?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장애인은 물론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준이 없다시피 했던 장애인의 차별 및 인권 침해에 대해 판단의 근거를 제시했다. 특히 장애인이 일상적으로 시달리는 차별에 대해 사회적 경각심을 갖게 했고 장애인들도 상황 개선을 위한 노력에 나서는 등 의식 전환에 큰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정보통신·의사소통 영역과 문화예술기관, 박물관·미술관, 공공도서관, 공공체육시설 등의 장애인 편의 환경이 개선됐다. 차별금지법 외 다른 제도 개선도 함께 이뤄지며 수화가 언어의 지위를 얻었고, 도시기반시설 및 건축물 전반에 무장애(Barrief Free) 인증이 확산하는 등의 변화도 찾아왔다.
그러나 장애인 차별문제가 실질적으로 해소됐는지를 묻는다면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다. 14일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장애인 차별과 관련한 진정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첫해인 2008년 585건에서 2010년 1695건으로 급증한 뒤 2015년 1146건, 지난해 1489건 등 매년 1000건 넘게 접수됐다.
차별 및 인권 침해가 발생한 뒤 인권위에 진정을 넣더라도 결과가 나오는 데 수개월이 걸리게 마련이고 남은 수단은 대부분 민사소송이다. 미국 등 선진국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정착됐지만 우리나라는 피해 원상회복 정도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소송을 통한 실익이 거의 없다. 또 법의 틀이 만들어진 지가 오래되다 보니 코레일 사례처럼 IT(정보통신기술) 발달이나 스마트시티 등 급변하는 사회 변화상을 수용하기에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의료적 잣대 아닌 기본인권 차원 접근해야
이는 장애인의 입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장애 등급을 분류하고 복지서비스를 설계한 부분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장애인이 일상생활에 얼마나 불편을 느끼고 업무·생활에 지장을 받는지를 깊이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의료적 기준을 적용한 데 따른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질환으로 거동이나 생활에 지장을 받는 정도가 큼에도 장애 등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장기이식 등을 통해 일상생활에 별 지장이 없음에도 많은 복지혜택을 누리는 경우가 동시에 발생한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의 김재왕 변호사는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서비스는 단순히 의료적 기준에 기반하기 때문에 실제 장애인의 욕구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현행 장애인과 관련한 법은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 장애인 건강권 및 의료접근성 보장에 관한 법률 등 10개가 넘는다. 이 중 장애인복지법이 대표격이지만 다른 법과 상호관계가 모호하고 사회변화상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장애인 단체를 중심으로 차별금지법 제정 10주년을 맞아 다양한 제도 개선 노력이 모색될 전망이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김성연 사무국장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며 장애인 차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심어준 부분은 있지만 차별 사안별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고 차별이 분명하더라도 처벌수위가 낮다”며 “4월10일 차별금지법 제정 10주년을 맞이해 제도 개선 운동과 다양한 연구활동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
출처: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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