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위한 건축물 조도와 대비도 고려해야
결혼을 한지 이제 9년 정도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소한 것들이 많이 변했지만 한 가지만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처가에 갈 때, 현관문을 들어서며 아내가 던지는 한 마디이다.
나와 동행할 때 문을 열자마자 아내는 늘 “제발 불 좀 켜고 살아”라고 부모님께 큰 소리로 이야기하곤 한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에 주로 처가댁을 방문하기에 장인어른이나 장모님은 의아해 하시곤 한다. 물론 아내에게도 처가의 실내 밝기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단지 시각장애를 가진 내가 밝은 곳에서 실내로 들어가거나 할 때 많이 힘겨워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이다.
아내는 항상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든든한 사람이 되어 주곤 한다. 무남독녀 외동딸인 아내가 중증시각장애인인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많이 반대하셨던 두 분과 혼자 맞서서 허락을 받아낸 사람도 아내였다.
세상에 아내 같은 사람이 좀 더 많았으면 살기가 한 결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특히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리모델링을 한 공공기관에 다녀올 때면 그런 생각이 더 간절해 진다.
밝은 실외에서 건물 내부로 들어가게 되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보이던 형태조차도 잘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린다. 이럴 때 아내처럼 누군가 불 좀 켜고 살라고 크게 외쳐준다면 좋겠다 싶다.
처가야 우리 아내의 집이니 아내가 외쳐주지만 공공기관은 공적인 공간이니 국가와 사회가 외쳐줘야 하지 않을까? 오늘은 이 이야기를 좀 써 볼까 한다.
공공기관이나 거리 등 공적인 공간에 대해서는 그래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어느 정도 소리를 낸 덕분인지 예전과 비교하면 많은 부분들이 달라졌고, 계속해서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이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BF)인증’이 아닐까 생각한다.
BF인증 웹사이트에서 BF인증은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인증에 관한 규칙(보건복지부, 국토교통부 공동부령) 등을 법적 근거로 하여 ‘어린이, 노인, 장애인, 임산부 뿐만 아니라 일시적 장애인 등이 개별시설물 지역을 접근·이용·이동함에 있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계획·설계·시공·관리 여부를 공신력 있는 기관이 평가하여 인증하는 제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2월 28일자 BF인증 접수 및 교부현황 자료에 따르면 약 1124개소 가량이 인증을 받았거나 신청한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시행시기를 고려해 보았을 때 적지 않은 기관들이 인증을 받았거나 인증을 신청했다 판단된다.
그런데 BF인증심사 기준을 살펴보니 보완해야 할 점들이 보인다. BF인증 심사 기준에서는 지역, 도로, 공원, 여객시설, 건축물, 교통수단 등의 분야로 나누어 다양한 요소들에 대하여 평가하고 있다.
다른 분야는 차치하고 건축물에 대하여 조금 이야기해 볼까 한다. 요즘 새로지은 건물에 가 보면 느껴지는 것이 딱 두가지 있다. 하나는 실내가 너무 어둡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닥과 벽, 그리고 기둥이 구분이 잘 안되도록 비슷한 색이나 재질로 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조도를 낮춘 것인지 아니면 심미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어두운 경우가 많다. 특히 밝은 실외에서 건물 내부로 들어갔을 때에는 그 불편함은 더욱 커진다.
또, 반짝반짝 빛나는 으리으리한 건물일수록 기둥이나 바닥 등을 구별하기 더욱 어렵다. 물론 이런 경우 계단 또한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보니 낯선 건물에 들어가면 위험천만한 상황을 자주 겪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물에 대한 BF인증 심사기준에는 어디에도 조도나 바닥과 벽면 등의 구분에 대한 기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분명히 BF인증에 대해 ‘개별시설물 지역을 접근·이용·이동함에 있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계획·설계·시공·관리’하는 것이라 소개하고 있지만 불편을 넘어 위험하기까지 한 상황인데 이에 대한 기준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나와 같은 불편을 겪는 사람은 극소수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BF인증이 장애인 중에서도 특정 장애인만을 위한 제도는 아니라 생각한다. 더욱이 국가통계포털의 2015년 자료에 따르면 등록시각장애인 총 252,874명 중 2급~6급까지의 시각장애인은 221,024명이나 되고, 1급 중 전맹이 아닌 이들을 합할 경우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또, 여기에 야맹증이나 망막이상 등 안질환을 가진 이들까지 합할 경우 소수라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에너지절약을 위한 것이라는 이유도 설득력이 약하다. 많은 공공기관들이 조명을 LED로 교체하였고, LED조명을 사용할 경우 기존의 조명기구들에 비해 전기사용량이 절반가량 줄어든다.
특히, 신축건물은 LED조명을 사용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낮은 조도나 간접조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안전을 위협받아 가면서 까지 에너지절약을 실천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을 만들기 위한 제도를 만들고 시행해 가는 것은 분명 약자들을 위한 사회적 배려로 매우 긍정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을 만들기 위한 평가 기준 속에서 다시 누군가는 소외된다면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이 또 다른 장애를 만들어 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일 수 있다.
제도의 취지에 알맞게 다양한 이들의 불편을 아우를 수 있는 심사기준 마련이 필요하다. BF인증이 불편한 이들을 위해 진정으로 대신 외쳐주는 이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제도로 자리잡아 가기를 바래본다.
출처: 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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