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의 이해와 관련하여] 어설픈 눈으로 산다는 것은
편의증진센터
2013-02-20
7872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3-02-18 17:01:36
우리는 시각장애인을 저시력과 전맹으로 나눈다. 저시력을 의학에서는 약시라고 한다. 약시는 amblyopia라는 학명을 가지고 있지만, partial sight라는 용어가 흔히 쓰인다. 눈은 강하고 약한 것이 아니며, 정안인은 강시가 아니므로 약시는 맞는 표현이 아니다.
Low Vision은 저시력으로, 시력은 수치로 나타내므로 수치가 낮다는 의미에서 저시력이 맞는 말이다. 특히 영어에서 partial sight는 부분적으로 본다는 것은 띄엄띄엄 본다거나, 시야가 좁아 일부분만을 본다거나 하는 의미로도 오해될 수 있다. 따라서 약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용어이다.
시각장애를 판정할 때는 시력을 기준으로 한다. 그런데 시력보다 사실상 더욱 중요한 것이 시기능이며, 시력은 원거리 시력과 근거리 시력이 있다. 장애판정에서는 6미터 떨어진 곳에서 시력을 측정하는 원거리 시력만을 사용한다.
시력이 낮아(나빠) 잘 보이지 않아도 잔존시력을 이용하여 잘 적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실수를 하는 사람이 있다.
길눈이 밝은 것은 시력과는 무관한 시효율성의 문제이다. 습관적으로 이면도로에서 보도블록으로 올라갈 경우에는 단차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몸에 적응이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같은 시력이라도 행동에는 큰 차이를 보인다. 넘어지느냐 마치 보이는 것 같으냐의 차이가 생긴다. 그럼에도 시력만을 기준으로 장애판정을 하고 있고, 근거리에서는 보여도 원거리를 못보면 시력이 전혀 나오지 않으므로 의학적 측정은 사실은 엉터리인 것이다.
시각장애인은 낮에는 잘 보다가도 밤에는 야맹으로 전혀 볼 수 없는 사람도 있고, 같은 백내장이라도 수정체의 어느 부위에 문제가 있는가에 따라 밝은 곳에서 조금 더 잘 보는 사람이 있고, 어두운 곳에서 조금 더 잘 보는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시각장애인은 개인마다 입장이 달라 장애라고 모두 같은 사람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시각장애인은 랜드마크가 매우 중요하다. 시력을 활용하지 않고 자신이 개발한 다른 판단 방식이 있는 것이다.
저시력인은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큰 물체들이 랜드마크이다. 적어도 자신에게 도시는 보이는 만큼의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동이나 접근은 이 랜드마크(표식)의 연속적 연결로 가능해진다. 모든 것을 입체로 다 보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인식표 출발점에서 다른 인식표로 방향을 정하고, 이동하는 것이다. 이 랜드마크는 계단, 단차, 전봇대, 큰 간판, 경사 정도 등 다양하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봄소풍을 갔다. 대구 달성공원으로 갔는데, 이곳은 동물원이 있는 대구의 가장 큰 규모인 공원이었다. 반 친구들과 줄을 맞추어 이동하면서 동물들을 구경하다가 코끼리가 큰 동물이라 내 눈에도 조금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아 정체를 하다가 친구들을 놓쳐 버렸다. 줄을 놓쳐버린 것이다. 혼자서 오전 내내 같은 반 아이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을 찾다가 점심때가 되니 한 친구가 지나가다가 “아이들이 저기 모여 있는데, 왜 혼자 따로 있느냐? 빨리 가보라.”고 하여 그 친구에게 방향을 묻고 가 보았으나, 친구들이 모인 장소를 찾지 못했다. 장소를 말해준 친구는 화장실을 가야 하는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속상했다. 아이들을 뒤늦게 만난들 또 나의 이야기로 “너 때문에”, “너 찾는다고” 등등 말을 들을 것 같았다. 봄소풍을 온 그 날만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출입구를 물어 공원 밖으로 나왔다. 행인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집으로 왔다. 물론 점심도 먹지 못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 말도 하지 않고 교사의 허락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었고, 반성문 제출과 화장실 청소를 벌칙으로 받았다.
나는 지난해 건강보험공단에서 회의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가다가도 또 일행을 놓쳐버린 적이 있다. 앞으로 직진을 조금 하다가 다시 데리러 오겠지 하면서 기다렸으나, 나를 찾으러 온들 주목을 받는 것이 싫고, 핸드폰으로 찾아오라고 하면 다시 헤맬 것이므로 그냥 택시를 타고 사무실로 와 버렸다.
택시 안에서 나를 찾는 전화를 받았으나, 나는 눈이 나빠 일행을 잃어버려 그만 다른 곳으로 간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일이 바빠 먼저 간다고 미리 말을 못해 죄송하다고, 급하게 일이 생겼다고 변명하였다.
사람들은 늘 잘 보는 것 같으니 한 번씩 실수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전맹이 아닌 이상 굳이 중간 중간 인원을 체크하는 배려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중학교 시절 나는 로터리를 건너다가 얼마나 돌아야 반대편에 도달하는지를 몰라서 방향감각을 잃어 사실은 제자리에 다시 와서 반대편 버스를 타게 되었다. 집으로 간다는 것이 엉뚱한 방향의 버스를 탔고, 종점까지 갔다. 다시 버스를 타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 부모님에게 시력이 나빠 잘못 탔다고 하지 않았다. 나쁜 사람을 만나 잡혀갔다가 겨우 탈출하다시피 집으로 오게 되었으며, 폭력배였던 것 갔다고 들러댔다. 있지도 않은 학교폭력 사건을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평소에 변명만 하고 살다보니 거짓말도 저절로 만들어졌다.
나 나름대로의 랜드마크를 찾아 헤매다가 사람을 만나면 먼저 나에게 아는 척을 해주기를 기다린다. 누구인지 먼저 알아보지 못하니 말이다. 말을 걸어오면 목소리를 듣고 누구인지 알 수가 있다.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아무리 동네 어른이라도 먼저 인사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는 척도 하지 않은 버릇없는 놈이 되기도 하고, 심한 꾸지람도 듣는다.
또 어떤 때에는 이런 것을 미리 방지하고자 인사를 한 것이 알고 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사람을 잘못 보았다며 사과를 하기도 한다. 특히 누구인지 구분해 보려고 자세히 보다가 째려본다며 맞은 적도 참 많았었다.
저시력인은 보이는 척하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자존심으로 자신도 잘 보이는 척을 한다. 굳이 티를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실수를 한다.
사람들이 도대체 너는 어느 정도 보느냐고 물으면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상대방은 얼마나 보는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으므로 비교해서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그저 들은 소리로 “시력이 0.2인데요.” 정도로 말하지만, 사실은 그런 수치로는 상대도 막연하게 알뿐 사실 얼마나 보는지 모른다. 최소한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려면 시력 0.7이 필요한지도 사람들은 모른다. 심지어는 자신도 시력이 나쁘다며 마이너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시력이 마이너스면 앞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뒤가 보이는지 말이다. 마이너스는 안경의 오목렌즈를 나타나내는 것이지 시력이 아니다.
버스를 탈 경우에는 버스 번호판을 볼 수가 없어 줄지어 서 있는 버스 가까이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 앞과 뒤를 계속 서성인다. 그러다가 버스 번호판 가까이 가면 기사는 타는 줄 알고 문을 열어 준다. 번호가 틀리면 기사에게 “죄송합니다.”까지는 말하지만, 시각장애라서 그런 행동을 한다고 설명하기에는 허용된 시간이 너무 짧다. 결국 이상한 미친놈이 되고 만다.
저시력인은 점점 시력이 나빠져서 언젠가는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을 전혀 보지 못할지도 모르며, 가족의 얼굴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리고 전맹들과 어울리면 전맹을 위해 잔존시력을 활용해 열심히 도와주면서도 “너는 보는 놈이잖아.”라는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힌다. 중증에게 가면 장애인이 아닌 것이다.
미국은 시각장애 몇 급이냐가 아니라 점자가 필요한 사람이냐, 보조기구가 필요한 사람인가로 나눈다.
저시력인은 정안인 사회에도 끼지 못하고, 전맹 사회에도 끼지 못하니 항상 주변인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시각장애 사회는 맹학교 동문의 계보에 들지 않으면 족보도 없는 장애인인 셈이다.
이런 복잡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정신적 문제를 가지기 쉽고, 항상 신경이 예민하고 농담을 잘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자신의 아픔을 가리는 것이고, 신경질적이고 패배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기 쉽다.
어느 한 저시력인이 일을 하러 갔는데, 저시력으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일하러 나왔다며 “남의 돈을 그냥 먹으려 하느냐”는 비난을 받고 직장에서 쫓겨났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공사판에 일하러 갔으나 모래와 시멘트 배합을 잘 못했다며 오히려 변상하라는 원망을 들으며 쫓겨났다.
이번에는 자동차 정비 업소의 보조로 일자리를 얻었으나, 제대로 보조를 하지 못한다며 공구로 머리를 얻어맞아야 했다. 공구로 맞은 후 그는 정신적 안정을 조절할 수가 없어 손님이 맡긴 차를 홧김에 몰고 나가 여의도를 질주해 버렸다. 그는 벌써 그 일로 살인미수가 되어 10년이 넘도록 감옥에서 살고 있다.
어설픈 눈으로 산다는 것은 어설픈 인생을 사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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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w Vision은 저시력으로, 시력은 수치로 나타내므로 수치가 낮다는 의미에서 저시력이 맞는 말이다. 특히 영어에서 partial sight는 부분적으로 본다는 것은 띄엄띄엄 본다거나, 시야가 좁아 일부분만을 본다거나 하는 의미로도 오해될 수 있다. 따라서 약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용어이다.
시각장애를 판정할 때는 시력을 기준으로 한다. 그런데 시력보다 사실상 더욱 중요한 것이 시기능이며, 시력은 원거리 시력과 근거리 시력이 있다. 장애판정에서는 6미터 떨어진 곳에서 시력을 측정하는 원거리 시력만을 사용한다.
시력이 낮아(나빠) 잘 보이지 않아도 잔존시력을 이용하여 잘 적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실수를 하는 사람이 있다.
길눈이 밝은 것은 시력과는 무관한 시효율성의 문제이다. 습관적으로 이면도로에서 보도블록으로 올라갈 경우에는 단차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몸에 적응이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같은 시력이라도 행동에는 큰 차이를 보인다. 넘어지느냐 마치 보이는 것 같으냐의 차이가 생긴다. 그럼에도 시력만을 기준으로 장애판정을 하고 있고, 근거리에서는 보여도 원거리를 못보면 시력이 전혀 나오지 않으므로 의학적 측정은 사실은 엉터리인 것이다.
시각장애인은 낮에는 잘 보다가도 밤에는 야맹으로 전혀 볼 수 없는 사람도 있고, 같은 백내장이라도 수정체의 어느 부위에 문제가 있는가에 따라 밝은 곳에서 조금 더 잘 보는 사람이 있고, 어두운 곳에서 조금 더 잘 보는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시각장애인은 개인마다 입장이 달라 장애라고 모두 같은 사람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시각장애인은 랜드마크가 매우 중요하다. 시력을 활용하지 않고 자신이 개발한 다른 판단 방식이 있는 것이다.
저시력인은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큰 물체들이 랜드마크이다. 적어도 자신에게 도시는 보이는 만큼의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동이나 접근은 이 랜드마크(표식)의 연속적 연결로 가능해진다. 모든 것을 입체로 다 보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인식표 출발점에서 다른 인식표로 방향을 정하고, 이동하는 것이다. 이 랜드마크는 계단, 단차, 전봇대, 큰 간판, 경사 정도 등 다양하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봄소풍을 갔다. 대구 달성공원으로 갔는데, 이곳은 동물원이 있는 대구의 가장 큰 규모인 공원이었다. 반 친구들과 줄을 맞추어 이동하면서 동물들을 구경하다가 코끼리가 큰 동물이라 내 눈에도 조금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아 정체를 하다가 친구들을 놓쳐 버렸다. 줄을 놓쳐버린 것이다. 혼자서 오전 내내 같은 반 아이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을 찾다가 점심때가 되니 한 친구가 지나가다가 “아이들이 저기 모여 있는데, 왜 혼자 따로 있느냐? 빨리 가보라.”고 하여 그 친구에게 방향을 묻고 가 보았으나, 친구들이 모인 장소를 찾지 못했다. 장소를 말해준 친구는 화장실을 가야 하는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속상했다. 아이들을 뒤늦게 만난들 또 나의 이야기로 “너 때문에”, “너 찾는다고” 등등 말을 들을 것 같았다. 봄소풍을 온 그 날만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출입구를 물어 공원 밖으로 나왔다. 행인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집으로 왔다. 물론 점심도 먹지 못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 말도 하지 않고 교사의 허락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었고, 반성문 제출과 화장실 청소를 벌칙으로 받았다.
나는 지난해 건강보험공단에서 회의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가다가도 또 일행을 놓쳐버린 적이 있다. 앞으로 직진을 조금 하다가 다시 데리러 오겠지 하면서 기다렸으나, 나를 찾으러 온들 주목을 받는 것이 싫고, 핸드폰으로 찾아오라고 하면 다시 헤맬 것이므로 그냥 택시를 타고 사무실로 와 버렸다.
택시 안에서 나를 찾는 전화를 받았으나, 나는 눈이 나빠 일행을 잃어버려 그만 다른 곳으로 간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일이 바빠 먼저 간다고 미리 말을 못해 죄송하다고, 급하게 일이 생겼다고 변명하였다.
사람들은 늘 잘 보는 것 같으니 한 번씩 실수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전맹이 아닌 이상 굳이 중간 중간 인원을 체크하는 배려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중학교 시절 나는 로터리를 건너다가 얼마나 돌아야 반대편에 도달하는지를 몰라서 방향감각을 잃어 사실은 제자리에 다시 와서 반대편 버스를 타게 되었다. 집으로 간다는 것이 엉뚱한 방향의 버스를 탔고, 종점까지 갔다. 다시 버스를 타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 부모님에게 시력이 나빠 잘못 탔다고 하지 않았다. 나쁜 사람을 만나 잡혀갔다가 겨우 탈출하다시피 집으로 오게 되었으며, 폭력배였던 것 갔다고 들러댔다. 있지도 않은 학교폭력 사건을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평소에 변명만 하고 살다보니 거짓말도 저절로 만들어졌다.
나 나름대로의 랜드마크를 찾아 헤매다가 사람을 만나면 먼저 나에게 아는 척을 해주기를 기다린다. 누구인지 먼저 알아보지 못하니 말이다. 말을 걸어오면 목소리를 듣고 누구인지 알 수가 있다.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아무리 동네 어른이라도 먼저 인사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는 척도 하지 않은 버릇없는 놈이 되기도 하고, 심한 꾸지람도 듣는다.
또 어떤 때에는 이런 것을 미리 방지하고자 인사를 한 것이 알고 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사람을 잘못 보았다며 사과를 하기도 한다. 특히 누구인지 구분해 보려고 자세히 보다가 째려본다며 맞은 적도 참 많았었다.
저시력인은 보이는 척하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자존심으로 자신도 잘 보이는 척을 한다. 굳이 티를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실수를 한다.
사람들이 도대체 너는 어느 정도 보느냐고 물으면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상대방은 얼마나 보는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으므로 비교해서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그저 들은 소리로 “시력이 0.2인데요.” 정도로 말하지만, 사실은 그런 수치로는 상대도 막연하게 알뿐 사실 얼마나 보는지 모른다. 최소한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려면 시력 0.7이 필요한지도 사람들은 모른다. 심지어는 자신도 시력이 나쁘다며 마이너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시력이 마이너스면 앞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뒤가 보이는지 말이다. 마이너스는 안경의 오목렌즈를 나타나내는 것이지 시력이 아니다.
버스를 탈 경우에는 버스 번호판을 볼 수가 없어 줄지어 서 있는 버스 가까이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 앞과 뒤를 계속 서성인다. 그러다가 버스 번호판 가까이 가면 기사는 타는 줄 알고 문을 열어 준다. 번호가 틀리면 기사에게 “죄송합니다.”까지는 말하지만, 시각장애라서 그런 행동을 한다고 설명하기에는 허용된 시간이 너무 짧다. 결국 이상한 미친놈이 되고 만다.
저시력인은 점점 시력이 나빠져서 언젠가는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을 전혀 보지 못할지도 모르며, 가족의 얼굴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리고 전맹들과 어울리면 전맹을 위해 잔존시력을 활용해 열심히 도와주면서도 “너는 보는 놈이잖아.”라는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힌다. 중증에게 가면 장애인이 아닌 것이다.
미국은 시각장애 몇 급이냐가 아니라 점자가 필요한 사람이냐, 보조기구가 필요한 사람인가로 나눈다.
저시력인은 정안인 사회에도 끼지 못하고, 전맹 사회에도 끼지 못하니 항상 주변인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시각장애 사회는 맹학교 동문의 계보에 들지 않으면 족보도 없는 장애인인 셈이다.
이런 복잡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정신적 문제를 가지기 쉽고, 항상 신경이 예민하고 농담을 잘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자신의 아픔을 가리는 것이고, 신경질적이고 패배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기 쉽다.
어느 한 저시력인이 일을 하러 갔는데, 저시력으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일하러 나왔다며 “남의 돈을 그냥 먹으려 하느냐”는 비난을 받고 직장에서 쫓겨났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공사판에 일하러 갔으나 모래와 시멘트 배합을 잘 못했다며 오히려 변상하라는 원망을 들으며 쫓겨났다.
이번에는 자동차 정비 업소의 보조로 일자리를 얻었으나, 제대로 보조를 하지 못한다며 공구로 머리를 얻어맞아야 했다. 공구로 맞은 후 그는 정신적 안정을 조절할 수가 없어 손님이 맡긴 차를 홧김에 몰고 나가 여의도를 질주해 버렸다. 그는 벌써 그 일로 살인미수가 되어 10년이 넘도록 감옥에서 살고 있다.
어설픈 눈으로 산다는 것은 어설픈 인생을 사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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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서인환 (rtech@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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