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난 1년간 515건 사례 분석… 주택과 사업 관련 해석 요청 많아
인천국제공항에서 외국 국적 항공기에 싣는 기내식은 수출품일까. 한 민원인이 법제처에 유권해석을 요청한 사안이다. 기내식을 수출품으로 보면 관세, 개별소비세 등을 환급받을 가능성이 있다. 법제처는 외국 국적 항공기에 실린 기내식은 ‘수출할 식품이 아니’라고 봤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불심검문 시 경찰관이 제시해야 하는 ‘신분을 표시하는 증표’로 공무원증을 촬영한 이미지 파일을 사용할 수 있을까. 경찰청 내부에서 이견이 생겨 법제처에 유권해석을 요청한 쟁점이다. 이미지 파일은 신분증 대용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유권해석이 나왔다. 법제처는 “이미지파일이 위조됐는지 확인하지 않는 한 불심검문하는 사람이 정당한 권한을 가진 경찰관인지 알 수 없다”고 봤다.
영향력 큰 유권해석
정부의 유권해석은 법령해석의 모호함이 발생했을 때, 정부부처나 법제처 혹은 법무부에서 전문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절차다. 법령에 모든 사항을 세세하게 규정할 수 없고, 입법과정에서 허점이 생기기 때문에 유권해석이 필요하다.
각 정부부처는 담당하는 법령을 일차적으로 유권해석한다. 예를 들어 국민권익위원회 소관 법령인 부정청탁금지법 사안은 권익위에 우선 유권해석할 권한이 있다. 부처 내부에서 의견이 모아지지 않거나, 정부부처가 낸 유권해석에 개인이나 법인이 불복하면 주로 법제처가 유권해석에 나선다. 유권해석은 법원 판결처럼 법적 강제성은 없지만 허가, 면허, 재산권 행사의 범위 등을 정부가 법리 검토를 한 뒤 판단하기 때문에 영향력이 적지 않다.
유권해석은 그 자체로 종종 논란이 인다. 유권해석이 요청된 사안은 애초에 법령해석을 둘러싼 의견이 엇갈리는 사안일 가능성이 크다. 주로 정치 쟁점화된 사안에서 유권해석이 이슈가 된다. 권익위는 최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지위와 검찰이 수사한 추 장관 아들의 군 휴가 미복귀 의혹이 “직무관련성이 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놨다. 경찰은 지난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 분향소 설치가 감염병예방법 위반인지 보건복지부에 유권해석을 요청하기도 했다.
지난 4월 28일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1단지 내 공터에서 개포주공1단지 재건축 조합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 형식의 관리처분변경총회가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정치 쟁점 사안에만 유권해석이 이뤄지는 건 아니다. 주간경향은 법제처 홈페이지에 공개된 2019년 9월에서 2020년 9월 사이 유권해석 사례 515건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를 보면, 주택이나 사업 관련 유권해석 요청이 가장 많았다. 대부분 재산권이나 이권이 걸려 있는 사안이었다. 환경규제 범위를 묻는 요청도 적지 않았다.
재산권 유권해석 요청이 압도적
법제처가 공개한 통계를 보면, 2011년에서 2019년 사이 법제처에 올라온 유권해석 요청 건수는 총 4127건이다. 이중 중앙행정기관이 요청한 유권해석 요청이 1799건으로 가장 많았다. 개인이나 법인을 포함한 민원인은 법제처에 1419건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민원인의 유권해석은 대부분 소관 부처의 유권해석에 동의하지 못해 이뤄졌다. 법제처 유권해석은 법원의 항소심처럼 기능했다. 지방자치단체가 요청한 유권해석은 909건이었다.
2019년 9월부터 1년 동안으로 범위를 좁혀보면 국토교통부와 환경부가 각각 17건으로 중앙행정기관 중 유권해석 요청이 가장 많았다. 두 부처는 각종 규제와 허가권을 쥐고 있다. 행정안전부(16건), 산림청(13건), 산업통상자원부(11건), 보건복지부(9건)가 뒤를 이었다. 행정안전부는 주로 공무원 자격, 승진 등에 관한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산림청은 환경규제를 둘러싼 유권해석 요청을 주로 했다.
가장 많은 유권해석이 요청된 분야는 주택이나 국토, 토지 이용에 관한 법령이었다. 지난 1년간 143건의 유권해석 요청이 있었다. 법제처의 별도 통계도 주택, 국토 관련 유권해석 요청이 많았던 사실을 뒷받침한다. 법제처가 제공한 통계를 보면, 최근 3년간 법제처에 유권해석 요청이 많았던 법령은 건축법,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공동주택관리법 순이었다. 법제처는 아니지만 국토교통부가 주택임대차보호법 도입 이후 내놓은 유권해석이 세입자와 집주인 간 권리 충돌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한 1급 시각장애인이 점자 유도블록이 끊긴 자리에서 어디로 갈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재개발, 재건축 등 재산권을 둘러싼 유권해석 요청이 많았다. 민원인들은 ‘주택 당첨자 지위를 취득해 실제 거주한 후 그 주택을 양도하고 다른 주택을 취득하면 지역주택조합 조합원의 자격이 있는지’, ‘소규모 재건축사업 조합설립인가 후 투기과열지구 지정 시 해당 사업의 건축물 또는 토지를 받은 사람은 조합원 자격이 있는지’, ‘분양신청을 하지 않은 토지 등 소유자가 현금청산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시행계획이 변경됐을 때 조합원 자격이 유지되는지’ 등을 물었다.
공공임대주택 거주 자격이나 임대료를 묻는 유권해석 요청도 적지 않았다. 공공임대주택의 새로운 임대차계약 체결 시 임대료 산정 기준, 공공임대주택 임차권의 양도 또는 전대가 허용되는 근무·생업 등 사유의 발생 시기를 묻는 유권해석이 눈에 띄었다.
기업 이윤과 직결되는 산업·환경규제를 둘러싼 유권해석(111건)이 뒤를 이었다. 규제를 피해 비용을 줄이려 한 민원인들의 유권해석 요청이 발견됐다. 민원인들은 ‘석면건축물 관리기준 중 석면건축물 조사 주기인 6개월마다의 의미’, ‘하수처리구역에서 폐수를 공공수역으로 배출하는 경우 적용되는 수질오염물질의 배출허용기준’ 등을 법제처에 물었다.
법령 공백 지적도
지난 1년 법제처 유권해석에는 의료·보건·복지(14건), 안전(15건)과 관련된 사례도 나왔다. 최근 법제처 유권해석에서는 장애인 이동권을 다룬 사례가 눈에 띄었다.
법제처에는 지난 7월 ‘장애인 출입이 가능하도록 설치해야 하는 출입구의 설치기준’을 묻는 유권해석이 접수됐다. 민원인은 건물의 주 출입구만이 아니라 건물 내 화장실처럼 공중 이용 목적 시설마다 장애인이 출입 가능한 출입구를 만들어야 하는지 물었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 등 편의법)은 장애인이 공공건물을 이용할 때 가능한 편리한 방법으로 최단거리로 이동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설치하도록 규정한다. 해당 법령은 공공건물에 출입할 때만이 아니라 ‘건축물 안 공중 이용을 주목적으로 하는 사무실 등에 출입할 때에도 불편함이 없도록 한다’고도 규정한다. 법제처는 “주 출입구는 물론 공중 이용을 주목적으로 하는 사무실마다 하나 이상의 출입구를 장애인이 출입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봤다. 법제처는 ‘사무실 등’에는 사무실뿐 아니라 일반 화장실처럼 ‘공중의 이용을 주목적’으로 하는 시설이 모두 포함됐다고 판단했다.
법제처 공식 블로그 갈무리
한 민원인은 점자블록의 설치기준 중 ‘공원과 도로 또는 교통시설을 연결하는 보도’는 공원 안의 보도인지 아니면 공원 밖의 도로의 일부인 보도를 의미하는지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주무 부처인 복지부와 법제처 모두 “공원 안의 보도를 의미한다”고 봤다. 법제처는 “공원 밖까지 규율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원에 설치해야 하는 점자블록의 설치범위를 보다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사회복지시설에서는 법률 미비로 규제 공백이 생긴 사례들이 발견됐다. 한 민원인은 아동복지법상 청소년활동시설의 자원봉사자라면 꼭 ‘사실상 노무를 제공하려는 사람’으로 볼 수 있는지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현행 아동복지법상 사실상 노무를 제공하려는 사람이어야 아동학대 관련 범죄 전력을 기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자원봉사자가 곧 사실상 노무를 제공하려는 사람인지 해석이 중요한 이유다.
법제처는 자원봉사자를 모두 사실상 노무를 제공하려는 사람으로 볼 수 없다고 봤다. 자원봉사자마다 활동 내용이 다르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법제처는 또 “자원봉사자까지 아동학대 관련 범죄 전력 조회 대상에 넣으려는 개정법률안이 경찰서 업무를 과중하게 하고, 자원봉사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입법화되지 못한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법제처는 “아동학대 관련 범죄 전력 조회대상인 ‘사실상 노무를 제공하려는 사람’의 범위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법제처에는 지난 6월, ‘영유아보육법 위반 사항인 보조금 부정수령 혹은 유용한 사람이 사회복지법인의 임원이나 사회복지시설의 장이 될 수 있는지’ 묻는 복지부의 유권해석 요청이 들어왔다. 법제처는 사회복지사업법에는 영유아보육법 위반한 사람을 임원이나 관장 결격사유로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영유아보육법을 위반했더라도 사회복지법인 임원이 되는 것은 제한할 수 없다고 봤다. 다만 법제처는 “사회복지법인의 임원이나 사회복지시설의 장의 결격사유로 규율하고자 하는 범죄 유형을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별표 하나에 ‘수천억원’
법제처에 오기 전 일차적으로 유권해석을 하는 정부부처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권익위는 유권해석으로 언론에 자주 오르내린다. 사안마다 해석 차이가 큰 부정청탁금지법이나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의 비리 의혹에 유권해석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권익위는 부정청탁금지법 유권해석 사례집을 별도로 낸다.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의 유권해석은 다른 부처의 유권해석보다 권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금융위 홈페이지에 올라온 유권해석 회신 사례를 보면, ‘은행통합형 P2P대출 가능 여부’, ‘전자금융감독규정, 단말기의 범위에 대한 해석 요청’ 등 금융사업에 얽힌 유권해석 요청이 많다.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금융위·금감원의 유권해석은 그 자체로 규제력이 강하다. 행정소송 등으로 따지기보단 대부분 해석을 따르는 편”이라고 말했다.
보통 정부부처는 고문 변호사에게 유권해석을 의뢰하거나 법령해석심의위원회(혹은 법령해석자문위원회) 등을 둔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일 때는 대형 로펌에 유권해석을 맡기기도 한다. 한 중앙부처 사무관은 “정부의 입장은 정해져 있고 논리나 근거가 필요할 때 보통 로펌이나 자문변호사에게 유권해석을 요청한다. 대형로펌의 유권해석일수록 권위가 실리기 때문에 윗선에 보고하기도 편하다”고 말했다.
대형로펌에게 유권해석은 돈벌이가 된다. 또 다른 대형로펌 변호사는 “법령에 달리는 ‘별표’ 하나 해석만 바꿔도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이 오가기도 한다”고 했다. 대형로펌에게 유권해석은 정부에 법령에 대형로펌 의뢰인들의 시각을 반영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한 대형로펌 홈페이지에는 ‘법제 컨설팅’을 소개하면서 정부 유권해석을 주요 사업 영역으로 소개했다. 각 정부부처 전관을 고문으로 두고 있다고도 알렸다. 대표 업무 사례로는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상 총투자비용의 범위 안에서 골프장 회원권을 분양해야 하는지 해석상 다툼을 두고 고객에게 유리한 법령유권해석을 얻어냄’이라고 밝혔다.
양홍석 법무법인 이공 변호사는 “부처별 전문적인 사안의 법률 판단을 할 전문가 풀이 넓지 않다 보니 자문위원회 구성도 한계가 뚜렷하다. 다양한 해석보다는 특정 입장을 대변하는 입장이 나오는 사례가 많다. 대형로펌 입김이 암암리에 반영되는 것도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출처 : 주간경향
해당 기사링크 :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4&artid=202010121412381&pt=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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