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에 사는 시각장애인 홍지명(가명·32)씨는 지팡이를 더듬으며 집에서 900m 떨어진 인근 복지관으로 향하는 길이 두렵다. 사물놀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매주 두 차례 복지관을 찾지만 삼전사거리 횡단보도 앞에만 서면 초긴장 모드로 돌입한다.
손을 더듬어 기둥에 설치된 음향신호기를 눌러도 횡단보도를 건너야 할 타이밍을 자주 놓치기 때문이다. 음향신호기와 연결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안내 멘트의 소리가 작은 데다 음질이 떨어져 주변 차량소음에 묻히기 일쑤다.
홍씨는 "대충 감으로 건너라는 안내 멘트로 생각하고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자동차 경적에 놀라 넘어질 뻔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초록불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알리는 안내 멘트도 잘 안 들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멈춰서 쭈뼛거리는 아찔한 상황에도 빈번하게 노출된다.
홍씨는 음질이 나빠도 그나마 안내멘트가 나오는 것에 감사한다. 대각선에 위치한 횡단보도는 아예 고장이라 버튼을 눌러도 안내멘트가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음향신호기 버튼을 찾는데도 애를 먹었다. 버튼은 규정상 바닥면에서 1.0m 내외 높이로 설치돼야 하는데 60㎝ 높이에 설치돼 있어서다.
◇장애인단체 현장조사 지적에도 방치
시각장애인의 이동권 확보를 위해 횡단보도에 설치된 음향신호기가 고장이 나거나 기준을 무시한 설치로 무용지물이 돼 방치되고 있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 확산과 함께 관련 음향신호기 설치가 늘었다지만 아직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인데다 사후 관리와 점검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뉴스1은 지난달 31일 시내 주요 도로의 횡단보도에 설치된 장애인용 음향신호기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앞서 2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현장 조사를 통해 지적한 부적절 설치 사례가 얼마나 개선됐는지 확인했다.
당시 지적받은 가락대림사거리, 도곡역, 삼전사거리, 트리지움 서문, 경기여고, 배명고사거리 등 6곳에 설치된 음향신호기 42개를 직접 확인한 결과 여러 곳에서 작동 문제가 아직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특히 강남구 도곡동 도곡역 횡단보도에 설치된 음향신호기는 위험천만해 보였다. 음향신호기가 설치된 기둥이 횡단보도에서 2.5m나 벗어나 있어 버튼을 누르고 그대로 건너다가는 자칫 교통사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 곳은 음향신호기가 설치된 기둥이 가로 화단 안에 들어가 있어 버튼을 누르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화단과 도로사이에 펜스까지 설치돼 버튼을 누르고 그대로 건넜다가는 도로 위로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맞은편 역시 음향신호기가 횡단보도에서 떨어져 설치 기둥과 도로 사이가 펜스로 막혀 있었다. 이는 2월 조사에서도 지적됐지만 아직도 개선되지 않고 방치돼 있는 상황이다.
송파구 삼전사거리에 설치된 8개의 음향신호기의 경우 5개가 고장이거나 설치가 잘못돼 있었다.
2월 조사 당시 문제로 지적된 기준보다 낮은 버튼 위치는 그대로였고 1개는 고장난 상태로 방치 중이었으며 신호기 음질이 불량이거나 기계 본체가 뒤집어 설치된 곳도 각각 1곳이었다.
강남구 경기여고 횡단보도는 문제로 지적된 버튼 규격은 새로 설치해 개선됐지만 1곳에서 음질이 불량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음향신호기의 스피커 출력방향이 횡단 방향과 달라서 문제가 됐던 송파구 가락동 가락대림사거리와 음향신호기 버튼 설치방향이 횡단 방향과 어긋나 지적받은 송파구 잠실동 트리지움 서문은 개선이 완료돼 있었다.
◇설치율 높아졌지만 관리·점검 부족
횡단보도에 설치된 시각장애인용 음향신호기는 2008년 서울시가 경찰청으로부터 관리와 점검 업무를 위임받으면서 개선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기복 시민교통안전협회 대표는 "2009년을 기준으로 이전과 비교하면 장애인이동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설치 비율과 설비가 비교적 많이 개선됐다"며 "하지만 설치 후 관리에 있어서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서울시내 횡단보도에 설치된 시각장애인용 음향신호기는 8월 현재 8075대로 전체 신호등 가운데 46%에 머무른다. 시는 내년까지 시내 전체 횡단보도의 50%까지 음향신호기를 확대 설치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도로교통공단과 서울시 6개 도로사업소, 음향신호기 제조사 업계 관계자 등과 함께 음향신호기 개선을 위한 현장점검을 매월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는 2~3월 시각장애인용 음향신호기 전수 실태조사를 실시해 이용 불편사항 1313건, 고장사항 370건을 발견해 현재도 계속 개선조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이 느끼는 체감 안전도는 여전히 기준 이하로 낙제점이다. 음향신호기의 절대적인 설치 수량 부족과 관리·점검 미비를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한다.
시각장애인 하지영(26)씨는 "횡단보도를 건너려 해도 음향신호기가 없는 경우가 많아 한참을 돌아다니기도 한다"면서 "그럴 땐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사람들이 걷는 소리를 듣고 횡단보도를 건너곤 한다"고 한숨을 쉬었다.
시각장애인 한만옥(59)씨는 "음향신호기가 고장나서 작동이 되지 않거나 버튼 사이에 이물질이 끼어서 작동이 되지 낳는 경우도 있다"면서 "설치도 중요하지만 사후 점검과 관리가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기복 대표는 "제품 규격 기준에 미달돼 음질이 불량이거나 동작이 잘 안되는 등 음향신호기의 품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이 같은 결함은 시각장애인들에게 큰 사고를 일으킬 수 있어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호등과 통합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해야
시각장애인용 음향신호기 관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합적인 관리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승철 시각장애인연합회 연구원은 "일반 신호등의 경우 중앙관제센터에서 원격으로 관리한다"며 "하지만 음향신호기는 따로 설치돼 원격 조정이나 관리를 할 수 없는 구조라 이를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 연구원은 또 "지속적인 관리를 위해선 먼저 제품에 대한 검증과 음향신호기를 납품하는 업체들에 대한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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