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심함을 반성하게 한, 사려니 숲길의 '배려'
편의지원센터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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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붉은오름 사려니숲길 입구.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의 비자림로 사려니숲길보다 접근성이 좋은 곳이다. | |
ⓒ 장호철 |
▲ 사려니숲길의 입출구는 1112번 도로의 비자림로 사려니숲길과 1118번 도로의 붉은오름 사려니숲길 등 두 곳이다. | |
ⓒ 한라산둘레길 |
사려니숲길은 제주시 봉개동 절물오름 남쪽 비자림로에서 물찻오름을 지나 서귀포시 남원읍 사려니오름에 이르는 약 15km의 숲길이다. 이 삼나무가 우거진 숲길은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므로 '사려니숲길'이라 불린다. 이 훼손되지 않은 '청정 숲길'은 제주 '숨은 비경 31곳' 중 하나로 특히 도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해발 500~600m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의 사려니숲길
사려니는 '살안이' 혹은 '솔안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에 쓰이는 '살'과 '솔'은 신성한 공간이라는 신의 영역에 있는 산 이름에 쓰이는 말이다. 따라서 사려니는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또 사려니는 '실 따위를 흩어지지 않게 동그랗게 포개어 감다'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해발 500~600m의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에 있는 사려니숲길은 원만한 평탄 지형으로 물찻오름에서 사려니오름까지 7개의 오름과 천미천, 서중천 등 두 개의 계곡을 끼고 있다. 전형적인 온대 산림인 사려니숲길에는 졸참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 등 천연림과 인공조림된 삼나무, 편백 등이 다양하게 자라고 있어 "에코 힐링(echo-healing)을 체험할 수 있는 치유의 숲"(비짓제주)이다.
사려니숲길은 한때는 차량 통행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그러나 2009년부터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본격적인 탐방로를 조성해 국제 트레킹대회를 치르면서 지금은 제주를 대표하는 숲길로 거듭났다. 10km 정도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의 사려니숲길은 어린이나 노인들도 쉽게 완주할 수 있어 탐방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사려니숲길 붉은오름 출입구 쪽의 삼나무숲. 하늘을 찌를 듯한 숲에 햇빛이 가느다랗게 비친다. | |
ⓒ 장호철 |
▲ 본격적인 사려니숲길이 시작되는 곳. 한때는 차량 통행이 이루어졌으나 2009년부터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본격적인 탐방로를 조성했다. | |
ⓒ 장호철 |
사려니숲길의 입·출구는 두 군데다. 1112번 도로에 있는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비자림로 사려니숲길'과 1118번 도로를 타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붉은오름 사려니숲길'이 그것이다. 여행 일정을 짜면서 검색해 보니 교래리 쪽보다 붉은오름 쪽으로 가는 게 좋다는 의견이 많았다. 우리가 묵은 숙소의 주인장도 붉은오름 지나 길가에 주차하면 바로 숲길로 들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붉은오름 사려니숲길의 삼나무숲
비자림을 나와 가까운 점심을 먹고 바로 나는 내비게이션에 '사려니숲길 붉은오름 입구'를 입력했다. 30여 분 달려서 사려니숲길 입구에 닿았는데 이미 갓길에 차량이 빼곡했다. 길옆으로 거대한 삼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게 어쩐지 낯이 익었다. 내가 다녀간 곳이었던가, 미심쩍어했더니 돌아와 수학여행 사진으로 확인해 보니 내가 간 데는 절물휴양림이었다.
사려니숲길의 입구는 현무암 정주석을 양옆에 박은 정낭(제주도 대문) 형식이었다. 산으로 드는 꽤 넓은 길 양옆으로 거대한 삼나무숲이 펼쳐져 있었다. 일직선으로 곧게 자라난 삼나무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은 마치 현실과 무관한 별천지 같았다.
▲ 무장애 나눔길 데크 길은 길폭 1.7m에 경사도를 완만하게 시공해 휠체어 등으로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 |
ⓒ 장호철 |
▲ 무장애 나눔길은 쉼팡(쉼터) 여러 곳을 만들고 등받이가 긴 나무의자를 두어 장애인들의 휴식을 돕고 있다. | |
ⓒ 장호철 |
▲ 미로숲길에는 공연장인 열린무대와 휴식하며 독서할 수 있는 ‘숲속 책장’도 갖추었다. 책장은 휠체어 장애인의 높이에 맞추었다. | |
ⓒ 장호철 |
무심하게 오른쪽 숲길로 접어드니 목재 데크로 조성된 길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폭이 넉넉한 길은 난간까지 갖추었는데, 어떤 데는 난간이 허리 아래까지 올라올 만큼 높았다. 데크 길옆 풀숲에는 둥글레 같은 풀과 군데군데 고사리가 피어 있었고, 아내가 반색을 했다.
멀쩡한 평지에 웬 난간까지 갖춘 데크길?
왜 멀쩡한 평지 길을 놔두고, 거기다 이런 데크 길을 만드느라 돈을 들이나, 하는 말을 나는 삼켜버렸다. 어쨌든 땅 위를 걷는 것보다는 편했고, 그게 무슨 까닭이 있어 만든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길은 가끔 네모 난 쉼팡(쉼터의 제주도 방언)으로 이어졌고, 거기 등받이가 긴 나무 의자에 사람들이 반쯤 누워서 편히 쉬고 있었다.
반대쪽 숲의 미로 숲길에는 공연장인 '열린 무대'와 휴식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숲속 책장'도 있었다. 데크 길이 끝나는 데서부터 비자림로의 사려니숲길 입·출구로 가는 10km에 이르는 넓고 완만한 길이 펼쳐진다. 이 숲길을 채운 나무는 삼나무뿐 아니라 편백, 졸참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쥐똥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 참꽃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다.
나무 아래는 천남성, 둥글레 따위의 풀과 석송, 뱀톱, 가는홍지네고사리 같은 양치식물이 덮고 있다. 덕분에 사려니숲은 오소리와 제주족제비, 팔색조, 참매, 쇠살모사, 제주도롱뇽, 큰오색딱따구리 같은 다양한 동물의 서식지가 되었다. 사려니숲에 서식하는 야생 동식물은 모두 78과 254종에 이른다고 한다.
가장 짧은 코스라도 다녀오면 좋았겠지만, 아내가 불편하여 애당초 5분 이상 걷는 일이 없을 것이라 약속한 여행이었다. 오전에 비자림에서 이미 넘치게 걸었으므로 우리는 되돌아섰다. 입구로 돌아오는 길섶마다 고사리가 지천이었다.
▲ 평일이라서 그런지, 봉개동 사려니숲 입구로 가는 숲길은 한산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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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길을 채운 나무는 삼나무뿐 아니라 편백, 졸참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쥐똥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 참꽃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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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려니숲에 서식하는 야생 동식물은 모두 78과 254종에 이른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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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엔 4월 초중순부터 순이 올라오기 시작해 5월까지 섬 전역이 고사리로 뒤덮인다. 고사리 잎이 될 부분이 주먹처럼 둥글게 감겨 있다. | |
ⓒ 장호철 |
아내는 고사리가 나타날 때마다 눈을 크게 떴다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곤 했다. 사람들은 이 숲길에서 고사리를 꺾지 않는 걸 묵계처럼 지키는 듯 어디에나 동그랗게 말린 고사리가 지천이었다. 아무도 꺾지 않은 고사리에 손을 대지는 못하고, 잎이 될 부분이 주먹처럼 둥글게 감긴 고사리순은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이다.
아무도 손대지 않는 고사리가 지천
4월은 제주 고사리의 시간이다. 4월 초·중순부터 고사리순이 올라오기 시작해 5월까지 섬 전역이 고사리로 뒤덮인다고 했다. 제주도는 4월 중순에서 하순께에 비가 자주 내리는데, 비 온 뒤 어린 고사리순이 우후죽순처럼 올라오므로 이때의 비를 '고사리 장마'라고 부를 정도다. 청정 자연에서 자란 무공해 제주 고사리는 맛과 품질에서 전국 최고란다.
사람들은 사려니숲길에 지천으로 피어난 고사리를 남의 것인 양 보고 지나친다. 아무도 독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숲에 피어난 고사리 새순에 손을 대는 것을 금기처럼 여겨서인지도 모른다. 아내는 누군가가 따서 먹을 수 있는 걸, 저렇게 버려둬 억세지는 걸 안타까워했다.
▲ 유네스코가 지정한 ‘제주 생물권보전지역’에 속한 사려니 숲길에서는 인간의 발길에 훼손되지 않은 숲 본래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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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나무숲 아래에 돌담을 두른 무덤. 나지막한 봉분 앞에 ‘공인현씨지묘(恭人玄氏之墓)’‘’를 새긴 빗돌은 측면인 길 쪽을 바라보고 있다. | |
ⓒ 장호철 |
다시 숲 입구로 돌아와 좀 전에 무심하게 지나쳤던 돌비가 눈에 들어오자 정신이 번쩍 났다. '사려니숲 무장애 나눔길'. 옆에 세운 안내판에는 제주시가 2020년에 펼친 '사려니숲 무장애 나눔길 조성사업'을 소개하고 있었다. 예산 8억여 원으로 사려니숲에 목재 데크 길 1.3㎞를 조성하고 쉼터와 점자 안내판, 안전 난간 등을 설치해 보행 약자층이 쉽게 숲을 이용할 수 있도록 시설을 보강했다는 내용이다.
장애인을 위한 장애없는 길, 그래서 숲은 더 아름다웠다
특히 데크 길폭을 1.7m로 넓히고 경사도를 완만하게 시공해 휠체어 등으로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공연히 돈을 들여서 만든 길이라고 속으로 나무랐지만, 그 길은 장애인이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든 '장애 없는' 길이었다.
나는 '비장애인'으로서 자신의 무심을 반성했다. 높다란 난간이나, 쉼터의 등받이가 긴 나무 의자, 나지막한 책장 등이 장애인의 이동에서 안전과 휴식을 위한 배려일 수 있음을 왜 몰랐던가. 그제야, 비장애인의 일상에서 장애인은 투명인간처럼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곤 했음을 깨달았다.
제주도는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 중증장애인, 65세 이상 어르신 등 교통 약자의 이동을 위해 2010년도에 교통약자이동지원센터를 열었다. 실제 장애인들이 느끼는 편익은 어떤지 모르지만, 365일 연중무휴, 24시간 운행하는 센터를 이용하면 사려니숲으로 오는 게 어렵지 않겠다. 설령 1년에 한 차례밖에 오지 못할지라도 장애인들이 장애 없이 거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려니숲길의 삼나무숲은 더욱 더 아름다워 보였다.
우리 세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해' 관련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도시의 길거리에 이어진 노란 블록이 '시각 장애인 유도 블록'(점자 블록)이라는 걸 알게 된 것도 쉰이 넘어서였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장애인 권리예산 확충을 주장하며 벌인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불편해하는 걸 넘어 적대시하는 승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버드 출신의 머리 좋은 30대 야당 대표는 이들의 시위를 '시민을 볼모로 한 비문명적 연좌'라고 질타했다. 그러나 '비문명'이라는 비난은 지하철 장애인 추락 사망 사고가 이어지는데도 21년이나 묵은 문제 해결을 모르쇠 하는 정부와 정치인에게나 돌려주어야 한다. 무릇 모든 시위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의 감수가 권리의 증진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자유 쟁취의 역사가 증명해 오지 않았던가.
해가 설핏 기운 삼나무숲에 앉아서 우리는 잠깐 쉬었다. 언제 사려니숲길을 완주해 볼 수 있을까. 모든 욕망을 소진할 수 있는 여행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우리의 여행은 언제나 미완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게 새로운 여행을 여는 힘이 되기도 한다. 언제쯤 다시 제주를 찾을지를 가늠해 보며 우리는 붉은오름 사려니숲길을 떠났다.
출처: 오마이뉴스
해당기사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3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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