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들로 붐비는 점심시간, 시각장애인들이 패스트푸드점 무인정보단말기(키오스크) 앞에 줄지어 섰다. 음성지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무인정보단말기 탓에, 시각장애인 손님들은 주문도 하지 못하고 화면만 더듬으며 한참을 헤맸다. 돈을 내고 햄버거를 사 먹으려는 평범한 행동은 그렇게 시위가 됐다.
11일 오전 11시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아래 시각장애인연대)는 맥도날드 서울시청점에서 시각장애인의 무인정보단말기 정보접근권 문제를 제기하며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산 것) 권리 찾기 캠페인’을 진행했다. 시각장애인 40여 명은 “우리에게 무인정보단말기는 ‘유리 장벽’과도 같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면서 음식점 등에 설치된 무인정보단말기의 배리어프리(barrier free, 장애인의 접근을 막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 보장을 촉구했다.
- 무인정보단말기로는 메뉴 선택조차 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
맥도날드 서울시청점은 입구 쪽에 설치한 무인정보단말기 5대를 통해 주문을 받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우선 이 무인정보단말기들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매장 입구에서부터 점자블록은 물론, 무인정보단말기의 위치를 안내하는 음성지원이 전혀 제공되지 않았다.
해당 매장의 무인정보단말기들은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도록 화면 버튼의 높이를 낮추는 기능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을 고려한 음성지원 기능이 있는 무인정보단말기는 단 한 대도 없었다.
침묵뿐인 무인정보단말기 앞에서 시각장애인들은 버튼의 위치와 용도를 확인할 수 없어 주문과 결제 진행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단계가 넘어갈 때마다 버튼의 위치가 들쭉날쭉하다 보니, 빈 화면만 누르기 일쑤였다. 김경석 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화면이 영어 모드로 바뀌어있었고, 원희승 씨는 힘겹게 담은 주문 내역이 모두 취소돼버리기도 했다. 직원은 주문번호를 외치며 음식을 받아가라고 했지만, 주문번호는 영수증에 묵자로만 적혀 있어 시각장애인들은 자기 음식이 나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몰려든 시각장애인들에 당황한 맥도날드 직원들은 허겁지겁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캠페인 참가자들은 평소에는 이날처럼 지원이 이뤄지지 않을 때가 많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캠페인이 시작되기 전, 매장에 먼저 도착한 김지효 씨와 송혁 씨가 카드 투입구를 찾지 못하는 등 무인정보단말기 앞에서 한참을 헤매고 있었지만 지원하러 나오는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김대민 씨는 “매장 직원이 ‘다른 일로 바빠서 못 도와준다’고 하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그 뒤로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시간에만 가게 됐다”면서 “(비시각장애인과) 식사 시간은 똑같은데, 왜 우리는 그 시간에 매장을 이용할 수 없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맥도날드의 경우, 무인정보단말기에 스크린 리더 기능을 탑재해 시각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캠페인이 지속되자 오후 1시경 한국맥도날드는 “본사는 시각장애가 있는 고객이 무인정보단말기를 원활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매장 내 담당 직원을 배치하고 있으며, 무인정보단말기 이용에 불편을 느끼는 고객 누구나 계산대에서도 상시 주문이 가능하도록 운영하고 있다”고 현장과 상반되는 해명을 내놨다.
- 현실 이런데 복지부 ‘단계적 적용’ 운운… “키오스크가 ‘말할 때까지’ 계속 행동하겠다”
이날 시각장애인연대가 ‘기습 시위’를 한 이유는 장애인의 무인정보단말기 접근권 보장을 계속 유예하는 태도를 보이는 정부 때문이다.
지난해 6월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며, 재화·용역 제공자가 무인정보단말기를 설치·운영하는 경우 장애인 편의 제공이 의무화됐다.
그러나 보건복지부가 민간 사업주의 눈치를 보며 ‘단계적 적용’을 운운하는 탓에, 장애인도 편리하게 무인정보단말기를 이용하는 세상은 요원한 상황이다. 복지부는 지난달 27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시행령 개정안의 초안을 공개했다. 개정안에는 무인정보단말기의 0.3m 앞에 점자블록을 설치하거나 음성안내를 제공해야 하며, 터치스크린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점자 라벨을 부착하고 음성지원 기능을 탑재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그러나 법 시행일인 2023년 1월 28일 이전에 설치한 무인정보단말기의 경우, 장애인 편의 제공 의무를 3년 동안 면제받는다. 남정한 시각장애인연대 대표는 “무인정보단말기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인데, 시각장애인은 2026년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소리냐”며 분노했다.
시각장애인들은 무인정보단말기 정보접근권은 나중으로 미룰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한다. 무인정보단말기는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사업주들이 인건비 경감 등을 이유로 가게에 무인정보단말기를 도입하며 사람이 아닌 기계를 통해 주문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이런 현상은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시대가 본격화되며 더욱 빠르게 확산했다.
강윤택 시각장애인연대 공동대표는 “직원 한 명을 붙잡고서 다른 손님들을 기다리게 하기도 미안해, 복잡한 메뉴 대신 간단한 메뉴만 시키곤 했다. 시각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키오스크를 구현하는 일은 기술적으로나 비용적으로나 전혀 어렵지 않다”면서 “앞으로도 키오스크가 ‘말할 때까지’ 계속 행동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로그인을 하시면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