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장애인 맞춤형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 사업 3년째…전국에 690개 불과
편의시설 모니터링 등 장애인 권익옹호 활동도 '노동'…1년 미만 '계약직' 한계
(서울=연합뉴스) 정한솔 인턴기자 = "이것도 노동이다.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 확대하라!"
이달 1일 오후 2시께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주최로 열린 '중증장애인고용촉진특별법 제정을 위한 Disability Pride 행진' 참가자 400여명(주최측 추산)이 모였다.
이들은 노동청 앞에서 종로구 마로니에공원까지 거리 행진을 하며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기존 장애인고용촉진법으로도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중증장애인을 위해 정부가 공공일자리를 발굴, 지원하라는 게 법의 주요 골자다. 특히 '권리 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의 확대를 요구했다.
이날 전장연 조은소리 활동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중증장애인의 권리를 외치고 있는 모두가 노동하는 중"이라며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를 노동으로 인정하고 확대 지원하라"고 주장했다.
◇ 사업 시행 3년째 맞는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
일반인에게는 아직 생소한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이 생긴 배경엔 고(故) 설요한 씨의 죽음이 있다. 중증장애인이었던 설씨는 2019년 정부의 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 지원사업에 참여해 동료들의 취업을 돕던 중 그해 12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장애인 단체들은 설씨가 이동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 달에 4명을 5회씩, 총 20회 만나는 등 과도한 업무에 실적 부담까지 더해져 숨졌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중증장애인도 수행 가능한 직무를 마련하라고 요구한 끝에 이 사업이 시작됐다.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3대 직무인 ▲권익 옹호 활동▲문화예술 활동▲장애 인식 개선 교육 활동으로 구성된다. 이 중 권익 옹호 활동은 장애인 편의시설 모니터링 및 개선 요구, 기자회견 참석 등을 통해 장애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Disability Pride 행진'도 이 활동에 포함된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3대 직무 [자료 출처 : 서울시]
이런 일자리에는 중증장애인 중에서도 보조기구나 보조인 없이는 스스로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힘든 최중증장애인을 우선 채용한다. 고용시장에서 쉽게 배제되는 이들에게 취업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서울시의 경우 주 20시간 일하는 '시간제 일자리' 참여자는 월 95만7천220원, 주 15시간 일하는 '복지형 일자리'는 월 71만7천920원을 받는다.
이 사업은 2020년 7월 서울에서 처음 시행된 후 여러 지자체로 확대됐다. 2022년 현재 서울, 경기, 경남, 전남, 전북, 춘천에서 약 690개 일자리를 운영 중이다. 장애 정도가 심한 장애인이 98만여명(2021년12월 기준 복지부 통계)인 점을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지자체에서 매년 예산을 편성해 수행기관을 모집하고, 선정된 기관은 일자리 참여자 채용, 교육, 복무 관리 등을 맡는다.
올해 서울시는 15개 법인과 비영리단체를 수행기관으로 선정했다. 그중 한 곳인 중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는 평일 오후 1시부터 5시 30분(휴게시간 30분 포함)까지 23명이 일한다.
지난 8월 26일에도 10월에 개최될 '중랑 장애인 인권 영화제' 부스 운영 준비작업이 한창이었다. 4~5명이 한 팀이 돼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 활동을 알리기 위한 피켓을 만들고 있었다. 팀의 리더를 자처하는 이지숙(57) 씨는 "그냥 네모로 자르면 시시하니까 하트 모양으로 자르는 거 어때요?"라고 동료들에게 제안했다. 옆에 있던 신동권(22) 씨가 곧바로 사물함에서 가위를 꺼내왔다. 집중해서 종이를 오려 붙이고, 색연필로 알록달록 그림을 그리자 금세 피켓이 완성됐다. 이날 중랑센터 노동 현장은 여느 곳과 다름없이 왁자지껄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 중증장애인만을 위한 일자리, 왜 필요한가
1991년부터 국가 및 지자체, 상시 근로자 50명 이상을 고용한 사업주는 장애인을 일정 비율 이상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한다. 이를 어길 시 고용부담금을 낸다. 그러나 이 제도로 고용 기회를 보장받는 건 대부분 경증장애인이다. 이들은 재활과 직업훈련 등을 통해 비장애인 수준의 노동이 가능하다. 반면 상대적으로 근로 능력이 부족한 중증장애인은 장애인 의무고용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실제로 2021년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장애인경제활동실태조사 따르면 중증장애인의 고용률은 21.8%로 경증장애인(40.3%)의 절반 수준이다. 나운환 대구대 직업재활학과 교수는 "장애인 의무고용제도로는 장애 정도가 경한 사람들이 주로 고용된다"며 "결국 중증장애인은 경쟁시장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근로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취업에 실패하거나 스스로 구직을 포기한 중증장애인들은 생활고를 겪는다. 2021년 서울복지재단 연구에 따르면 서울시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 참여자 275명 중 66%가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계층이다. 이들 중 최근 4년간 다른 일자리를 경험한 비율은 15%에 불과하다. 고용시장에서 밀려난 중증장애인들에게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중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는 이성용(49) 씨도 경제활동은 이번이 처음이다. 20년 가까이 병원에서 지내던 이씨는 현재 장애인 시설에서 생활하며 장애인 권익 옹호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장애인 편의시설 모니터링이 가장 재미있다고 한다. 그는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다 보니 그동안 일할 엄두도 못 냈다"며 "이 일을 하면서 통장에 돈이 쌓이니 든든하고, 경제 관념도 생겼다"고 했다.
환자로 격리됐던 중증장애인들이 어엿한 노동자로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회적 교류는 증가하고 소외감과 우울감은 줄어든다. 급여를 받으면 기초생활수급비가 줄어듦에도 계속 일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장연 우정규 활동가는 "일은 단순히 밥벌이 수단이 아니다"라며 "일해 본 경험이 전무했던 중증장애인들이 일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 권익 옹호 활동도 노동으로 인정할 수 있나
'이것도 노동이다.'는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의 핵심 구호다. 장애인이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은 돈을 벌어다 주지도, 상품을 대량생산해주지도 않는다. 이윤 창출이 최우선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도 노동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장애인 권리 활동가들은 '100% 노동'이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재화를 만드는 것만이 노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법, 교육, 예술, 인권 등 보이지 않는 가치를 창출하는 일도 일종의 공공재 생산 활동이며, 특히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의 3대 직무는 장애 당사자가 하지 않으면 비장애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한다.
김상현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노동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한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활동"이라며 "정치도 사회에 필요한 노동으로 인정받는 만큼 장애인의 권익 옹호 활동도 노동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를 노동으로 보기 힘들다는 시각도 여전히 있다. 이에 대해 장애인 권리 활동가들은 '사회적 가치'를 편협하게 해석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도 사회 전체를 이롭게 하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우정규 활동가는 "한국은 아직 사회적 가치에 대해 성숙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며 "그러니 중증장애인들이 하는 활동도 노동으로 인정해달라고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운환 교수는 "단기 계약직인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 확대가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라며 "시장에서 선제적으로 중증장애인 적합 직무를 개발하고, 정규직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장에선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 확대가 시급하다고 한다. 시장이 앞장서 중증장애인 맞춤형 일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러기엔 현실적 한계도 크다는 이유에서다. 전장연 노동권위원회 정창조 간사는 "시장에서 먼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다"면서도 "지금 당장 실현하기엔 너무 많은 게 바뀌어야 하니, 일단 정부 예산을 통해 공공일자리를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출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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