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4.01.22 00:41 / 수정 2014.01.22 00:41
인도 위 지뢰 볼라드 … 서울 박창선씨
잘 안 보이고 충격 흡수 안 해
서울 32% 불법 … 부상 위험
서울 강남구의 한 빌딩과 도로 사이에 석재 볼라드 여러 개가 잇따라 세워져 있다. 사유지에 설치된 볼라드는 관련법이 없어 대부분 높이가 낮고 재질도 돌이나 철이다. [김경빈 기자]
서울 마포구 현석동에 사는 회사원 박창선(32)씨는 최근 정강이와 무릎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서울 강남구 삼성역 인근 인도에 설치된 ‘볼라드(bollard·차량진입억제용 말뚝)’에 부딪혀 넘어졌기 때문이다. 거래처와의 약속에 늦어 뛰어가다 사고가 났다. 박씨는 “ 높이가 낮은 말뚝을 보지 못했다”며 “잘 안 보이는데다 재질이 돌이라 통증도 심했다”고 피해를 호소했다.
보행자 보호를 위해 설치된 볼라드가 오히려 보행자들을 위협하고 있다. 볼라드는 차량이 인도에 진입해 보행자를 치거나 인도에 주차를 하는 걸 막으려고 세운 말뚝이다. 하지만 상당수 볼라드가 석재·철재 등 규정에 맞지 않는 재질이거나 높이가 지나치게 낮아 보행자 부상 위험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시각장애인 사이에서 석재 볼라드는 부딪혀 부상당하는 일이 잦아 ‘도로 위의 지뢰’로 불린다. 시각장애 1급인 김원숙(60·여)씨는 2012년 4월 안산의 한 횡단보도에서 석재 볼라드에 걸려 넘어져 오른쪽 팔목이 부러지는 등 전치 10주의 부상을 당했다. 지난해 10월 수원지법 민사항소 1부는 김씨가 안산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볼라드 높이가 낮고 돌로 만들어져 설치·관리상 하자가 있다”며 “안산시는 253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서울시가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우레탄 재질로 만든 ‘표준형 볼라드’.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 시행규칙 9조에 따르면 볼라드의 재질은 안전사고 등에 대비해 충격을 잘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높이는 80~100㎝, 지름 10~20㎝에 간격은 1.5m 내외로 규정돼 있다. 시각장애인이 미리 발견할 수 있도록 말뚝의 0.3m 전에 점자블록도 깔아야 한다. 서울시 교통시설팀 천주영 주무관은 “이 규정은 보행자가 충돌하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석재·철재 등은 부적합 재질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내 인도에선 여전히 규정에 어긋난 볼라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서울시가 지난해 9월 25개 자치구의 볼라드 실태를 조사한 결과 전체 4만3392개 중 1만3828개(31.9%)가 불법 시설물이었다. 이 중 약 80%는 석재 볼라드다. 시는 2009년부터 규정에 안 맞는 볼라드를 우레탄 재질의 ‘서울시 표준형 볼라드’로 교체 중이다. 하지만 실제 정비를 하는 자치구들은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한계를 호소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볼라드를 모두 정비하는 데 50억~60억원이 드는데 지난해 자치구가 편성한 예산은 총 9억여원”이라며 “실적 좋은 자치구에 시비를 지원하는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빌딩 주변 등 사유지에 설치된 볼라드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규정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 21조에는 “시장과 군수는 보행자가 안전하고 편리하게 보행할 수 있도록 차량진입억제용 말뚝 등을 설치할 수 있다”고만 돼 있다. 사유지에 대해선 아무런 법 규정이 없다. 한 볼라드 업체 관계자는 “민간에선 90% 이상이 내구성과 미관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석재를 산다”고 말했다.
건국대 강병근(건축학) 교수는 “사유지라도 보행자가 다니는 곳은 사실상의 공공 영역”이라며 “사유지에도 볼라드 관련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이승호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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